"대한민국이라 쓰고 기적이라 읽는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불법적으로 강점당한 지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과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1945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를 강제로 무단점거함.) 9년이 지난 1919년,
조선인들은 3.1 운동을 통해 독립 국가임을 선포한다.
3.1 운동의 구호가 "대한독립 만세"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3.1 운동으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은 몇개월 동안 전국으로 퍼지고, 당 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진다. ( 대한민국의 헌법은 1919년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뒤로 광복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이 더욱 가열하게 진행되었고, 일제의 탄압도 거세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해방됨과 동시에 미국-소련 양국의 분할 점령과 신탁 통치를 겪었고, 미·소 군정기의 정국 속에서 벌어진 혼란한 시국 아래에서 냉전 초기 극도의 좌우 이념 대립을 겪게 되었다.
여운형, 김규식 등의 중도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미 우익 세력과 친소련 좌익 세력의 반목은 심화하였고,
소련 당국이 남북 총선거를 위한 UN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장을 거부하면서, 결국 남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에서 정권을 넘겨 받으면서 한반도 이남 지역에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6.25 전쟁을 거쳐 나라 전체가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으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를 국민들의 퇴진 운동으로 몰아내었다.
하지만 민주당(1955년)을 중심으로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세워진 제2공화국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파 간에 첨예한 대립으로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국내에 혼란한 정세를 틈타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의 내각을 무너뜨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수립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 발전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등으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산업화를 이루었으나, 유신 개헌, 독재 등으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그 후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마련해 1962년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이후 제5대 대통령 선거로 제3공화국을 세움으로써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정치가 시작된다.
전두환은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뒤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전두환은 폭압적으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였으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거센 요구는 계속되었고 결국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등을 거쳐 6.29 선언에 따른 9차 개헌을 통해서 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석 달 만에 군부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완전히 해체하면서 군부독재 정치는 완전히 끝이 나게 된다.
이 와중에도 경제 개발을 시작하고 대성공하여, 88서울 올림픽, GDP 1만 달러 돌파, OECD 가입 등으로 1980년대~1990년대 중반은 경제 부흥으로 대한민국의 자신감이 가장 부풀어 올랐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충격을 받은 뒤 한국 국민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지금 누리는 부가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2만 달러대까지 성장한 뒤 2018년 3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냈으며 21세기에 들어서 선진국으로 들어선 몇 안 되는 국가이다.
물론, 시대가 빠르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면서 많은 사회 문제들이 생겼다. 그리고, 조금씩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만 아직 대한민국 내부에서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하는 여러 가지 산적한 문제들이 아직도 사회 밑바탕에 많이 남아있다.
또한, 한국은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원조를 주는 공여국으로 바뀐 국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2025년 1월 기준으로 세계 6위의 공여국으로 되었다.
- 임시정부 수립 및 독립선언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법무 총장에 이시영, 내무 총장에 안창호, 외무 총장에 김규식, 교통 총장에 문창범, 군무 총장에 이동휘, 재무 총장에 최재형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1919년 4월 11일에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의 수립이 당면 과제로 부각되자, 국내외 독립지사 29명이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허름한 셋집에 모여서 그들의 모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이후인 11일, 역사적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국호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이 짧은 기간 안에 망했으므로 '대한' 대신 '조선'으로 칭하자."라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초대 교통 총장을 지낸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의견이 임정 요인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서 대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열린 1948년 7월의 제헌 국회에서도 대한·조선·고려 등의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투표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미 북한에서 '조선'이라는 칭호를 가져간 탓도 있긴 했었다.
그리고, 1948년 7월 제헌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 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 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
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법과 생각이 달라 서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초기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였고,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으면서 서로 충돌하였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 운동으로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1921년 임시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 뒤,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동휘는 한형권, 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는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김립을 암살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조직망의 파괴와 외교 선전 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내로 돌아가 버렸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 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 대통령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었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였다.